레오나르도는 사랑이 어떤 느낌인지를 모르며, 그에게 그것을 가르칠 방법도 없는데, 왜냐하면 사람의 감정을, 그것을 결코 경험하지 못한 누군가에게 묘사하려 하는 것은 타고난 장님에게 초록색을 묘사하려는 것과 다소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레오나르도에게 무엇이 그 감정을 일으키는지를 말할 수 있고 그것의 결과에 대해 말해 줄 수 있지만, 어쨌든 이런 묘사들은 요점을 놓치는 것인데 사랑의 본질적 특징은 모든 감정의 본질적 특징처럼, 바로 그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무엇처럼 느끼는 것인데, 그것이 무엇처럼 느끼는 것이 바로 사랑을 정의하는 속성입니다.
그 정의적 속성이 묘사되기 힘든 것을 우리는 어떻게 연구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정서적 경험이 어떤 것인지를 항상 말할 수는 없지만 그들은 한 경험이 다른 경험과 얼마나 비슷한지를 보통은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용하는 영리한 기법을 심리학자들은 개발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수십 개의 정서 경험들의 유사성을 평정하게 함으로써, 심리학자들은 다차원 척도법이라고 하는 기법을 사용하여 그런 경험들의 지도를 그릴 수 있었습니다.
부엌으로 곧장 들어가다가 곰이 찬장을 향해 코를 킁킁거리고 있는 것을 본다면, 당신은 공포를 느끼고, 심장은 쿵쿵거리기 시작하고 다리 근육은 달아날 준비를 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윌리엄 제임스는 정서를 일으키는 사건들은 실제로는 정반대의 순서로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먼저 당신은 곰을 봅니다. 그다음 당신의 심장은 뛰기 시작하고 다리 근육은 긴장합니다. 그다음 당신은 공포를 경험하는데, 이것은 당신 신체 반응에 대한 경험에 불과합니다. 제임스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신체의 변화들이 흥분적인 사실의 지각에 곧이어 일어납니다. ∙∙∙∙∙ 그리고 신체 변화와 같은 변화에 대한 느낌이 바로 정서입니다.” 제임스에게 각각의 독특한 정서 경험은 생리적 반응의 독특한 패턴의 결과였으며, 그래서 그는 심장의 두근거림과 근육의 긴장 없이는 정서 경험이 절대 있을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심리학자인 칼 랑게는 거의 같은 시기에 비슷한 주장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생각은 이제 정서의 제임스-랑게 설로 알려져 있는데, 자극은 자율신경계에 활동을 일으키고, 이것은 다시 뇌에서 정서 경험을 일으킨다고 주장합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정서 경험은 세상 속의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우리의 생리적 반응의-원인이 아니라-결과입니다.
제임스의 제자였던 월터 캐논은 이 생각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제자인 필립 바드와 함께 대안 이론을 내놓았습니다. 정서의 캐논-바드 설은 자극물이 자율신경계의 활동과 뇌의 정서 경험을 동시에 일으킨다고 주장했습니다. 캐논은 몇 가지 이유에서 제임스-랑게 설보다 자신의 이론이 더 낫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첫째, 몸은 종종 천천히 반응함에도 정서는 빨리 생긴다고 지적했습니다. 예를 들면, 얼굴 붉힘(홍조)은 당황스러움에 대한 신체 반응인데 15초 내지 30초 걸려서 일어나는데, 이를테면 바지가 남들 앞에서 벗겨졌다는 것을 알아차린 지 수초 내에 당황한 느낌이 듭니다. 그러면 얼굴 붉힘이 어떻게 그 감정의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인가요? 둘째, 사람들은 종종 심장 박동률과 같이 신체 반응을 정확하게 탐지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만일 자신의 심장 박동률의 증가를 탐지할 수 없다면, 사람은 그러한 증가들을 어떻게 정서로 경험할 수 있을 것인가요? 셋째, 만일 방 온도와 같이 비정서적인 자극들이 정서 자극이 그러는 것과 같은 패턴을 일으킬 수 있다면, 그러면 왜 사람은 열이 날 때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가요? 마지막으로, 캐논은 사람들이 갖는 모든 독특한 정서 경험들을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독특한 패턴의 자율신경 활동들은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만일 많은 수의 서로 다른 정서 경험들이 같은 패턴의 신체 활동들과 연관된다면, 그런 활동 패턴이 어떻게 그 정서 경험의 유일한 결정인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요?
이것들은 모두 좋은 질문이며, 캐논이 이 질문을 한 지 약 30년이 지나서 심리학자인 스탠리 샤흐터와 제롬 싱어는 몇 가지 답을 제시하였습니다. 제임스와 랑게는 정서를 신체적 반응들의 지각과 동등하게 취급한 점에서 옳았지만, 캐논과 바드도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광범한 수의 정서들을 설명하는 데에 충분히 구별되는 신체적 변화가 거의 없다는 점을 주목한 점에서 옳았다고 그들은 주장하였습니다. 제임스와 랑게가 서로 다른 정서들은 서로 다른 패턴의 신체 활동들에 대한 서로 다른 경험들이라는 점을 주장한 반면, 샤흐터와 싱어는 서로 다른 정서들이, 그들이 ’미분화된 생리적 각성’이라고 부른 단일 패턴의 신체 활동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일 뿐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샤흐터와 싱어의 이요인 이론은 정서들이 생리적인 각서의 원인들에 관한 추측들에 근거한다는 이론입니다. 부엌에서 곰을 보면, 당신의 심장이 고동치고 시작합니다. 당신의 뇌는 재빨리 환경을 훑어보고 그 고동에 합당한 설명을 찾는데, 마침내 다른 것들보다 곰을 발견합니다. 곰과 두근거리는 심장을 모두 알아챈 다음, 당신의 뇌는 뇌가 잘하는 것을 합니다. 즉 이것저것을 종합하여 논리적 추리를 해서 당신의 각성을 공포로 해석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람들이 그들이 두려워하리라고 생각하는 무엇인가가 나타났을 때 생리적으로 각성된다면, 그들은 그런 각성을 공포라고 이름 붙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을 기쁘게 하리라고 생각하는 무엇인가가 나타났을 때 정확히 똑같은 신체적 반응을 경험한다면, 그들은 그 각성을 흥분이라고 이름 붙입니다. 샤흐터와 싱어에 따르면, 사람은 모든 정서적 자극물에 대해 동일한 생리적 반응을 가지고 있으나, 그들은 서로 다른 경우에 따라 그 반응을 다르게 해석합니다.
이요인 모형은 지난 반세기 동안 어떻게 대접받았나요? 그 모형의 주장들 중 하나는 꽤 잘 대접받았습니다. 예컨대, 한 연구에서 참가자들은 생리적 각성을 일으키는 에피네프린을 주사받은 다음, 얼빠진 공모자 혹은 끔찍한 공모자에게 노출되었습니다. 이요인 이론이 예측하듯이, 공모자가 얼빠진 듯이 행동했을 때, 참가자들은 자신들이 행복했다고 결론을 내렸으나, 공모자들이 끔찍하게 행동했을 때, 참가자들은 자신들이 화가 났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후속 연구들은 사람들이 다른 식으로, 예컨대 실험실에서 자전거 운동기구를 타서 각성되었을 때, 마치 그들은 자신의 운동 유발 각성을 매력, 짜증, 혹은 재미로 해석하는 것처럼 그들은 곧이어 매력적인 사람을 더 매력적으로, 짜증이 나는 사람은 더 짜증이 나는 것으로, 재미있는 만화는 더 재미있는 것으로 경험했습니다. 정말로 이런 효과들은 사람들이 그들이 각성되었다고 단지 생각할 뿐인 경우에도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그들이 빠르게 고동치는 심장의 오디오 테이프를 듣고 자신이 듣고 있는 그 심장박동 소리가 자신의 것이라고 믿도록 유도되었을 때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각성의 원인에 대해 추측하고, 이 추측들이 그들의 정서 경험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할 때 이요인 모형은 옳은 것처럼 보입니다.
댓글